듣고 싶던 그 한 마디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하는 심정처럼 괴롭고 슬픈 일이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를 미워하며 살아왔다.
그 아픈 감정의 시작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중학교 진학의 꿈이 무산되던 날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6년 내내 선생님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우등생이었다. 교무실에서 마을로 연결된 확성기에다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동화책을 낭독했으며 상급생들이 졸업을 할 때는 저학년 대표로 송사를 읽었다. 내가 들길을 지나가면 논밭에서 일을 하던 어른들은 허리를 펴며 나를 칭찬했다. 그럴 때면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담아주는 그런 직업인이 되고 싶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졸업을 하게 되자 교장 선생님께서는 나를 우수 장학생으로 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시켜줄 테니 숙식만 해결하게 해달라고 어머니께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난했던 홀어머니는 여자가 이름자나 쓰면 됐지 무슨 중학교냐고 한마디로 내 진학을 막아버렸다. 선생님께서 눈시울을 붉힌 채 “아까운 녀석, 가엾은 녀석” 하시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날 나는 어머니에 대한 실망감과 미움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바닷가로 달음질쳤다. 앞길이 막힌 내 인생처럼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고향 섬으로 부딪치는 파도 소리는 밀려오는 한탄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그 파도소리는 절망하는 내 울음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학교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나는 한창 공부할 청소년기를 남자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다. 어머니와 헤어져 도시에 있는 남자 형제들의 어린 살림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섬을 떠날 수 없으셨는지 혼자 섬에 남아 있었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야 정이 깊어지는지 나는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정마저 떨어져갔고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은 원망만 커져갔다.
결혼을 해서 형제들에게서 벗어나자 나는 내 못다 이룬 꿈을 펼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에겐 자식 키우고, 남편을 내조(內助)하는 일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내 자식들은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키기로 다짐을 하며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 자식과 남편을 위해 나를 아끼지 않았다. 틈틈이 내 능력에 맞는 일도 찾아 해가며 가계를 꾸려갔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내게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소녀 시절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다 교복을 입은 또래들을 만나면 부럽고 자존심이 상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또 사노라니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던 각종 서류에 최종학력을 기입해야 할 때마다 얼마나 슬펐던가. 나는 그런 아픔과 자격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말단 사원인 남편의 월급을 축내기가 미안해서 교육기관으로 배우러 다니지도 못하고 힘겹게 독학을 해서 중학교 졸업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막상 합격을 하니 아이들과 남편이 나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자 나는 자식들 뒷바라지에 온 신경을 써야 했기에 대학까지 가려는 내 꿈은 일단 접어두었다.
그리고 그 후 남매가 모두 바라던 대학에 합격을 했고, 내 어머니는 그때도 역시 “이제 한풀이 했구나. 더 이상 공부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이 옳게 들리지 않았다. 한풀이로 아이들을 공부시킨 게 아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요,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은 자식들일 뿐 내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단순한 내 어머니는 내가 결혼할 때도 돈이 없어 결혼 비용을 남에게 빌려다 쓰셨고, 남편과 나는 그야말로 안 먹고 안 입고 노력하고 저축해서 그 이상으로 보답해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누구네 딸, 누구네 자식은 부모에게 뭣도 해주고 뭣도 해주었다 하면서 은근히 부러워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정말 미웠지만, 자식 된 도리라 생각하며 원하시는 여행이며 반지 등을 해주곤 했다.
연세가 많아지자 뭍으로 옮겨오신 어머니는 대물림처럼 가난한 아들과 함께 살면서 가끔씩 내 집에 오시면 아들보다 조금 나은 형편인 내게 아들네 가난 타령을 해댔다. 아들이라고 동생만 상급 학교에 진학을 시켰을 때 그 동생을 위해 내가 부엌에서 보낸 세월도 그랬고, 지금도 형편에 맞추어 돕고 있는데 더 어쩌란 말인가. 그럴 때마다 분에 못이겨 어머니에게 버럭 화를 냈다가도 어머니가 가시고 나면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서 남몰래 눈물을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자식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나자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여전히 혼자 하는 공부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과정은 지도해주는 이 없이 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복습에 복습을 거듭하는 내게 여전히 어머니는 “이제 와서 공부는 해서 무엇 할 거냐. 그만 두어라” 하고 무책임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화창한 어느 봄날, 나는 드디어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등학교 졸업자격증을 받았다. 아, 그 날의 하늘은 얼마나 푸르고 높았던가. 또 꽃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동안 쌓였던 고달픔과 피곤함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내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어렸다. 정말 가슴이 터질 듯 벅찼다.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축하를 받고, 나는 곧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고 기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어머니는 덤덤하게 “알았다”고 말할 뿐이었다. ‘고작 그 말뿐이라니…’ 나는 또 어머니가 야속했다.
서글픈 마음을 털어버릴 겸 찬거리를 사러 나갔다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전화를 끊으며 흐뭇한 얼굴로 “장모님이 날더러 고맙대. 당신이 시켜야 할 공부를 내가 다 시켰다고 정말 고맙대”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울컥 하고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내가 어머니에게 듣고 싶던 말이 바로 그런 말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내 마음에 살얼음이 스르르 녹아내림을 느꼈다.
오늘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내가 한국방송대학 국문학과에 합격했다는 통지서였다. 내 나이 곧 오십이지만 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지식이라는 보화가 가득한 창고’인 대학의 문 안에 들어선 것이다. 척박했던 나의 내면에 이제부터 그 보화를 차곡차곡 쌓으며 언젠간 나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 보화를 나누어주리라. 그리고 졸업을 하는 날 다시 어머니께 전화를 드릴 것이다. 그때는 어머니가 “장하다. 내 딸아”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머니를 진심으로 미워한 적은 없었으며 어머니의 가난했던 형편과 아픈 속마음을 다 이해한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드리고 싶다. 아니, 어머니가 아무 말 안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어머니를 사랑했으니까…. 그 날을 그려보니 몹시도 행복하다.

한 인애 : 1953년생으로 전남 진도군 가사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만학의 꿈을 이루어 이번에 2001학번 새내기 대학생이 됨. (월간 샘터 2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