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여! 모세의 아내여!

 

89년 8월 14일. 그 날을 나는 결단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공휴일인 다음 날, 임진강변에서 가족 캠핑을 계획한 몇 가정 중에서 유독 우리에게만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을

아내는 내 여동생을 옆자리에, 두 딸과 조카 녀석은 뒷자리에 태우고 목적지를 향해 먼저 출발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 일을 마치고 따로 출발한 나와 매제가 가족들과 약속한 장소에서 가족을 찾아 보았지만 누구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근처 마을로 나와 집에 전화를 걸어본 후에야 끔직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현동 일신병원에 입원 했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전화를 했지만 여자 어른 한 사람과 아이 하나가 사망했다는 것 뿐. 신원조차 확인해 주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면서 밤 11시경 병원에 도착해 보니 가족들이 나를 붙잡고 마구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한 결과 동생과 큰 딸은 현장에서 즉사하여 이미 영안실에 가 있었고, 아내는 응급실에 흰 시트로 덮인 채 누워 있었습니다. 아마도 심장은 멎지 않은 상태였었던가 봅니다. 그러나 둘째 딸은 뇌에 심한 손상을 입고 있어 그냥 놔두면 곧 사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수술을 해도 80% 밖에는 가망이 없으며, 설령 살아난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진단이 있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원장실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새벽 2시경 아내가 움직인다는 것 입니다. 들어가보니 피투성이에 갈기갈기 찢긴 온 몸. 이마가 터지고 얼굴이 부어올라 알아보기 어려운 아내가 괴로운 신음을 내다가, 으악! 하고 괴성을 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뇌수술을 받았던 둘째 딸도 언니를 따라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하루 아침에 두 딸을 모두 잃은 것 입니다.

8월 17일. 애들의 장례식을 치루기로 되어 있는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잠깐 조카의 병실에 와 있는 나를 찾았습니다. 환자가 죽어 가고 있으니 빨리 내려와 보라는 것 입니다. 뛰어가보니 과연 아내는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숨을 크게 몰아쉬는 것이 몇 분의 문제가 아니라 몇 십 초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교회 성도들이 울부짖으며 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기도도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웬지 기분이 침착하게 가라 앉았고,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께서 아내를 더 사랑 하시지 않습니까?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감사로 여기겠나이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아내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일단 위기를 벗어난 것일 뿐 산소 호흡기로 목숨을 이어가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선 안 되겠습니다. 별 수는 없겠지만 종합병원에라도 데려가는 것이......

갈 테면 가 보라는 식의 체념 섞인 말을 듣고 나서 다음 날 아침, 딸아이의 장례식 전에 아내를 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아내는 그 뒤 두 달 반이나 거기에 있어야 했으며, 나는 거의 매일을 중환자실 바깥 계단에 24시간 대기해야 했습니다.

사태는 매우 위험 했습니다. 다소 늦게 전신마비임을 알고 보니 주치의는 엑스레이 사진 촬영 결과 경추 5,6,7번에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늦게 연탄 집게 모양의 추를 양쪽 머리에 찔러 넣고 폐렴 방지를 위해 목에는 구멍을 내어 가래 빨아내는 기구를 장치 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요.

다친 부분은 앞 이마 패임, 갈비뼈 4개 골절, 오른 팔 골절, 경추 손상 등 13가지가 넘었는데, 며칠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혈소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혈소판이 20~30만개인데 아내는 2~3만개로 떨어져 있어 위험하다는 것 입니다. 급히 회사와 교회 성도, 동생이 일하는 회사 등에서 B형의 피를 가진 건장한 남자를 수소문해야 했습니다. 한바탕 소란 끝에 간신히 수혈을 했고 아내는 다행히 회복을 하는 듯 했습니다.

숨을 돌리고 있자니 주치의가 또 나를 소환 합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큰 일이 났다는 것 입니다.

패혈증 입니다.

"......"

건강한 사람도 이렇게 되면 위험에 빠지는데 부인은 다 죽게 된 상태라 아마도 나아질 가망은 만분의 일도 안 됩니다.

만분의 일……”

멍하니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는 내 모습을 누가 봤다면 글쎄 뭐라고 표현 했을까요.

하나님, 어떤 뜻이 있으신 겁니까? 아내를 정녕 데려 가시려는 생각이십니까?

의사 방을 나오면서 나는 중얼거렸습니다. 정말이지 세상에 이런 악몽이 두 번 다시 있을까 싶게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이었습니다.

 

너의 이름을 모세라 하겠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갓 태어난 나에게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돌림자에도 없는 그 이름은 6.25 직후 죽음에서 건짐 받았다는 뜻과 당신의 높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서원으로 하여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 하였다는 표시였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 밑에서 배재학당을 나오신 아버님은 감리교 권사로서 시골의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 하셨고, 제일 먼저 교회를, 그리고 초등학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지으신 신앙의 실천자였습니다.

모세라는 희귀한 이름은 어려서부터 놀림감이 되는 등 나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학교의 규칙상 호적에도 없는 한자를 만들어 이름표를 달고 다녀야 했으며, 고등학교 때는 전교생 중 유일하게 한글 이름을 갖고 있다고하여 521주년 한글날 기념식 때에 한글 실용상 표창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 시절, 박 모세는 까만 뿔명찰로 새겨진 ROTC 장교 후보생 가슴에서 만인에게 공개 되기도 했는데, 그 이름이 주는 종교적 중압감으로 인해 몇 번이나 개명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지 모릅니다. 박 모세……

그렇습니다. 그 엄청난 아버지의 서원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편없이 찌그러진 신자에 불과 했습니다. 서른 다섯이 될 때까지 감리교회에서 교회생활을 했는데, 모태신앙인인 나에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장해 오는 과정에 나는 순수한 믿음을 잃고 세련된 선데이 크리스챤이 되어 있었습니다.

겉으로 봐서 믿음이 좋다고 인정 되어서인지 집사도 빨리 되었지만 교회에는 주일 낮 예배 한 번만 나갔고, 그것도 담배를 양말 속에 감춰 다니곤 했습니다. 대학, 군대, 사회(직장) 생활을 하는 가운데 담배와 술도 곧잘 했고, 그것이 조금도 죄스럽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술, 담배 못하는 교인들을 고리타분한 종교인으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당시(70년대) 인기 좋은 무역회사에 발을 들여 놓은 나는 고급 나이트크럽, 룸 싸롱 등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바이어 접대라는 명목 아래 전혀 부담을 갖지 않았습니다. 처음 내 집인 아파트에 입주할 때도 나는 양주병을 자연스럽게 진열해 놓았었습니다.

술과 담배에 찌든 나를 하나님이 벌 주신 것일까요? 아니, 아닙니다. 그 후 1983년 여름에 있었던 동해안에서의 신앙집회는 나를 완전히 딴 삶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은혜를 체험한 아내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그 집회에서 나는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고백을 처음으로 했던 것 입니다.

그 후에 일어난 나의 변화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술, 담배를 끊게 된 것은 물론이고, 일 주일에 겨우 한 번 나가던 교회를 매 집회마다 기쁨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석하게 된 것 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리라는 축복이 이런걸까요? 교회에서는 대번에 성가대 지휘자로 발탁 되는가 하면, 아내도 역시 예배 반주자로, 심방 전도인으로 인정 받아 적은 나이에 집사로 임명 되었습니다.

회사도 급신장하고 진급도 척척 이루어졌으며, 아이들 역시 믿음 안에서 유난히 똑똑하고 건강하게 잘 성장 했습니다. 이름에 대한 열등감도 해소되어 은혜를 받기 전에는 MOSEI라고 쓰던 영어 표기도 MOSES라고 자랑스럽게 사용 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내가 종사하고 있는 이 섬유업계의 바이어들은 상당수가 유대인들로서 모세라는 내 이름이 그들에게는 퍽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사실 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모세라는 이름도 그들 가운데는 상당히 있었으니까요. 사무엘, 요엘, 요셉, 아론, 그리고 박 모세.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끼리 장사를 하니 얼마나 효과가 좋았던지.

그 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장미빛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제 살만하다고 가족 모두가 행복해 있을 때였습니다. 이 행복을 만끽한지 꼭 6개월만인 8월 14일. 공휴일을 즐기러 매형, 매제네와 요트까지 매달고 가던 바로 그 날 저녁, 운명의 사건은 우리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간 것 입니다.

 

아아, 모세여, 모세여.

구약성경의 모세가 40세에 바로의 궁전을 나왔던 것처럼 한국의 박 모세는 40세에 사랑하는 두 딸을 잃고 아내는 전신마비 환자가 된 채 미디안 광야에 나섰던 것 입니다. 그게 우연이었을까요? 장미빛 세상에 머물러 있던 나와 호화로운 바로의 성안에 왕자로 자랐던 모세. 40세에 애굽인을 죽이고 광야로 나가던 모세와 40세의 절대절명의 문 앞에 서야 했던 나.

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라 시내산 불 붙는 가시떨기나무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그 때 나는 거의 매일을 어둡고 컴컴한 중환자실 복도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면회시간마다 들어가 아내의 입에 미음을 먹여 주던 나는 처음에는 목숨만 건졌으면, 그 다음에는 눈 한 번 떠 봤으면, 또 말 한 번 해 봤으면, 일반 병실에 나와 봤으면 하고 간절히 소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던 휠체어의 환자가 얼마나 부럽고, 목발 짚은 불구자가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2달 반이 지나자 담당의사는 경추수술을 위해 영동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래간만에 환경이 바뀌어진 것 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옮겨 놓고 보니 목 수술을 받아야 할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등, 허리, 엉덩이, 발꿈치에 이르기까지 무려 여덟 군데나 욕창이 생긴 것 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악창이 바로 이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엉덩이 부분에 욕창은 얼마나 크고 깊던지 차마 눈 뜨고 보기가 무서웠습니다. 경험이 많아 보이던 간호사마저, 이건 정말 너무했다. 이렇게 크고 심한 욕창은 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흔들 정도였습니다. 그 때부터 인턴이 방문하여 매일 두 번씩 살을 도려내고 긁어내고 했는데, 그 때마다 시체 썩는 냄새로 얼굴을 돌려야 했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몸, 끊일 줄 모르고 찾아오는 합병증과 그에 따르는 고통. 아내도 울고, 나도 울고. 부러진 목에 이물질을 넣어 겨우 목 하나를 지탱하게 한다거나, 일어나 휠체어에 기대 앉는 것만으로 최상의 기대를 해야 할 뿐이라는 국내 제일 가는 종합병원 의사의 말씀.

차라리 아이들이 죽을 때 나도 데려가 주시지……” 흐느끼며 내 뱉는 아내의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아아, 모세여. 모세의 아내여.

구약의 모세가 가시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나는 죽어가는 아내의 침상 옆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사고 당시 두 딸 아이가 죽은 걸 어떻게 아내에게 알린단 말인가?

열 달 이상 숨겨 온 그 비밀을 말해 주어야 했을 때 나는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입니다.

아이들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때마다 이리저리 거짓말로 둘러대왔던 건 그 충격으로 상처가 악화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90년 6월의 어느 날. 처가 식구들은 차마 못 보겠다고 자리에 같이 하기를 사양하고 몇몇 형제들과 만약의 사태를 위해 의사 선생님, 목사님이 대기한 가운데 그 비극의 소식을 전해야 했던 날.

여보, 사실 우리 아이들은……”

잠시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운전하던 차에 함께 탔던 사랑하는 두 딸이 그 즉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

사실은…… 아이들을 주님이 데려 가셨소.

그 말을 듣자 아내는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몸을 부르르 떠는 것도 같았습니다.

둘씩이나……”

“……”

둘을 다 데려 가셨어……”

 

아아, 모세여. 모세의 아내여.

병원에서 그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런 치료를 받는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나와 아내를 돌아보아 주셨는지 참으로 그 얘기는 길고도 긴 얘기가 될 것 입니다.

부러진 목뼈에 이물질을 넣어야 했을 때 더러운 욕창이 나게 하셔서 그 욕창 치료가 오히려 목뼈의 접합을 도와 주었다는 사실. 아이들이 죽었다는 말을 하기 며칠 전부터 아내의 꿈속에 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타나게 하셔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셨다는 사실.

성탄절에 병원을 방문하신 목사님으로부터 붉은 포도주와 생명의 떡을 받아 먹으면서 목뼈가 나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하셨던 주님.

아니, 이럴 수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소. 목뼈가 저절로 붙었어요.

놀라며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던 의사의 얼굴.

 

89년 8월 14일. 그 날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날은 우리 딸 둘이 천국에 입성한 날로 기념될 것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내의 생일로 축하할 것이며, 우리 부부가 진정으로 거듭나게 된 날로 기념하게 될 것 입니다. 아내는 아직도 전신마비 환자 입니다. 이제 겨우 휠체어에 앉을 수 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아내가 제일 즐겨하는 일은 찬양과 전도 입니다.

그 긴 세월, 아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내를 통하여 전도 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찾어오곤 합니다. 꼼짝 못하고 누워서 자신의 처지를 서러워하고 있는 다른 환자를 향해,

이것 보세요. 나는 이렇게 온 몸이 마비 되고서도 하나님을 찬양 하쟎아요. 거짓말 같거든 내 얼굴을 보세요. 내 얼굴이 진짜로 평안한 모습인가, 아닌가 확인해 보세요. 그깟 팔 하나 부러진 것 갖고 울지 마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 하신답니다.

 

아아, 모세여. 모세의 아내여.

그렇습니다. 오늘도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를 씻기고,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 입히고, 운동을 시킨 다음 회사로 출근할 것 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임을 이젠 결단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우리가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사랑하는 아내의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나아갈 것 입니다. 오늘 저녁엔 미리 그 곳에 가 있는 딸들에게 긴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 박 모세 씨는 부인의 사고 후 장애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장애인 특수사역을 하리란 결심을 한다. 그 사역을 위해서는 장애인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그는 93년 11월 6일 목사 임직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아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에 도착한 첫 날, 두 사람의 여권은 물론 유학관련 서류와 한 동안 쓸 현찰이 들어 있던 가방을 도난 당하기도 하고, 진도 7.2의 노우스리지 지진을 경험하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시련들이 그들을 흔들고 지나갔지만 이미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뿐이었다.

현재 물댄동산 선교회 전임목사로 사회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소외된 장애인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섬기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를 향해 장애인 사역을 펼칠 비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가 작시하고

커크 패트릭(William J Kirkpatrick)이 곡을 붙인 곡 중에서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홈커밍 프랜드가 케네디 센터에 모여 한 CCM 공연 중에서 녹음한 것입니다.
카렌 펙(Karen Peck) 과 래리 포드(Larry Ford)가 곡 중 솔로로 등장합니다.

 

"He Hideth My S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