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언어생활

 (바른 어희 사용이 교회개혁의 밑거름)

 

말은 의식의 집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다. 즉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의식의 표현이라는 견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의식에 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바른 말을 사용하도록 지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바른 말을 사용함으로서 건전한 의식을 소유한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 이다. 성경에도 예수께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한다(마15:18)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뜻은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말이 사람을 더럽게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는대로 말은 어휘와 어휘가 합쳐져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어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바른 말의 여부가 상당 부분 가려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구사하는 언어 가운데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여러가지 오용 사례를 지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우선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오용 사례를 거론하고자 한다.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을 "하나님"으로 표기하고 있다. 언젠가 가톨릭교와 개신교가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할 때 God을 가톨릭교에서는 "하느님"으로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으로 고집하고 끝까지 의견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유일신이 아니라 유이신(?)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개신교에서 주장하는대로 唯一의 뜻을 담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 어법상으로는 틀린 번역이다.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하느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제한적인 신을 뜻하지 않고 우주를 주재하는 전능하신 신을 뜻하는 단어이며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도 공간적으로 제한된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노래하고 있고 우주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고치치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주기도문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고어 성경에서는 God을 "하"자에 "ㄴ"밑에 아래아 자인 ".(점)"을 찍고 "님"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말의 어원은 하늘님이고 딸님 아들님에서 "ㄹ"이 탈락해 따님 아드님이 된 것과 같은 이치로 "ㄹ"이 탈락해 하느님이 된 것이다. (숫자 하나를 뜻하는 고어는 "ㅎ"밑에 아래아 자인 ".(점)"을 찍고 "나"로 표기했다.) 그리고 우리 언어 관습에서는 복수 호칭을 격상해서 부를 때 직함 다음에 존칭 어미인 "님" 자를 붙이지 숫자 다음에 "님" 자를 붙이지 않는다. 즉 "목사님 두분" 이렇게 말하지 "목사 두분님"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말이 관행으로 널리 쓰이다 보니 지금은 사전에 까지 올랐기 때문에 이제와서 다시 어법에 맞게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고치자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어법을 무시해가며 유일신을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고집했다면 다음 몇 가지 단어도 그에 호응하도록 정확히 사용하자는 이야기다.

먼저 축복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축복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빌 祝 자에 복 福 자로 복을 빈다는 말이다. 우리가 승진이나 졸업 입학 등 축하할만 한 일이 있을 때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듯이 복을 빌어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축복합니다'라고 말하면 정확하고 완벽한 표현이다. 그런데 기도를 들어보면 대부분 "하나님! 000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 이 기도의 내용을 풀어보면 "하나님! 000에게 복이 내리도록 빌어 주시옵소서"가 된다. 복의 근원인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빈다는 말인가? 이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것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뿌리를 흔드는 중대한 과오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은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 000를 축복합니다." 또는 "하나님! 000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유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바른 표현이다.

무엇 보다 성경에서 축복과 복을 어떻게 구별해서 쓰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축복과 복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사용되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한 곳만 예시해 본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창12:3)"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복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임하도록 기원할 때는 축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다음으로 헌금과 교회라는 단어다. 헌금의 뜻은 돈을 바친다 이다. 단어의 뜻이 말하듯이 단순히 돈을 바치는 것이 헌금이고  왜 바치는지 그 목적이 없다. 그래서 보통 왜 바치는지 그 바치는 목적에 따라 구제헌금 정치헌금 건축헌금 등과 같이 목적이 되는 단어를 앞에 첨가해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고 일반적으로 헌금의 경우 돈을 사용하는 주체가 스스로 돈의 사용 내역을 밝히지 않는 한 바친 돈의 사용 내역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리지도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연보는 자기의 재산을 내어 남의 부족을 도와준다는 뜻이 말하듯이 단어 속에 돈을 바치는 목적이 명확히 드러나 있으며 따라서 돈을 사용하는 주체는 돈을 바친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돈이 목적대로 쓰여졌는지 그 내역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목사가 강단에서 여러분은 (돈을)바칠 의무가 있고 나는 (사용처를)밝힐 의무가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얼핏 듣기에는 목사와 일반 성도간에 신뢰 관계에 근거한 꽤 신앙적인 말 같으나 이는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고 대부분의 금전적인 부조리가 이러한 사고발상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성경에도 헌금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고 오늘날은 여러 종류의 번역판이 출판되면서 연보와 헌금이라는 단어가 구별되지 않고 쓰이는 경향이 있으나 관주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도 연보와 헌금을 분명히 구별해서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누21:1-4)"

왜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연보궤에 넣는 돈을 연보라고 하지 않고 헌금이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왜 보잘 것 없는 두 렙돈의 연보를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을까? 아마도 부자들이 내는 돈은 연보의 목적이 아니라 그저 성전을 출입하면서 남의 이목도 있고 습관적으로 몇 푼 꺼내서 바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금 예배당에서는 가난한 과부처럼 연보를 드리는 자세 보다는 헌금의 양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억으로 50-60년대 까지만 해도 예배당에서 예배 때 일반적으로 내는 돈은 연보였다. (물론 그 때도 특수 목적으로 내는 돈은 앞에서 거론한대로 헌금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들어서면서 시나브로 헌금이 연보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70년대에 급속히 추진된 경제성장 정책, 그리고 그로인해 파생된 황금만능주의 사고방식이 예배당에도 스며든 결과가 아닌가 한다.

교회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알고있는 대로 성경적으로 교회라는 말은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당연히 건물은 예배당이고 사람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사람과 건물이 함께 교회다. 아니 건물이 교회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부흥하면 성도 개개인의 신앙 성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 건물 크게 짓고 사람 많이 모이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잘못된 어휘 선택과 무분별한 사용이 가져다 준 폐단의 일면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다는 말이 있다. 지금 부터라도 축복과 헌금 교회라는 단어는 성경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다음은 '일요일'과 '예배본다'라는 말이다. 긴 부연 설명이 필요없이 '일요일'은 휴일의 개념이다. 피곤한 육신이 휴식을 취하는 날인 것이다. 그러나 '주일'은 글자 그대로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면서 지내든지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며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예배를 본다'라는 말도 '예배를 드린다'로 고쳐 써야 한다. 주지하는 대로 구약 시대 때는 까다로운 제사 규칙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는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예배다. 또 사전적인 의미도 본다는 동사에 '예배를 드린다'는 뜻은 없다.(말은 습관이기에 널리 통용되는 말은 학자에 따라 사전에 올리기도 하고 따라서 '본다'는 말에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기록한 사전이 있기도 하나 이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본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구경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배를 본다'는 것은 '예배 행위를 구경한다'는 뜻과 통하고 따라서 예배당은 얼마나 큰지, 강단은 잘 꾸몄는지, 목사는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은 얼마나 모이는지, 예배 순서는 어떤지 등등 예배 내용 보다는 '예배 외적인 것을 구경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 단어는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다. 사전에서 '예배'라는 명사가 동사로 쓰일 때는 '예배하다'고 실제로 성경에서도 '예배하다'로 쓰고 있기 때문에 원칙을 이야기하자면 '예배하다'로 써야하지만 문제는 일상 생활에서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예배하다, 예배하고, 예배하니, 예배할 곳, 예배할 때 처럼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경한다'는 뜻의 '예배본다' 보다는 예배 행위 전체를 예배라는 명사로 생각하고 이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예배드린다'로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이 단어는 축복, 헌금,교회라는 단어와는 그 비중이 다르다. 이 세 단어는 기독교의 근간과 연관이 있지만 예배보다, 예배하다, 예배드리다는 동사의 선택에 국한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보는 사람과 주일에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사람과는 글자 몇 글자 차이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서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기도 끝의 시제(時制) 문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끝맺는 것을 듣게 되는데 이는 우리 언어 정서상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이다. 우리 언어 정서와 습관에서 어떠한 한 행위는 그 행위가 끝났을 때 과거형으로 표현하지만 말은 그 말이 끝날 때 까지는 현재인 것이다.

예를 들면 밥 먹는 행위가 끝났을 때는 "밥 다 먹었습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표현하지만 말은 "여보! 미안하지만 물 한잔만 갖다 줄래요.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표현하면 어색하고 "여보! 미안하지만 물 한잔만 갖다 줄래요 부탁합니다."처럼 현재형으로 표현해야 보다 자연스럽다. 마찬가지 원리로 기도도 기도가 다 끝날 때 까지는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기도가 다 끝난 다음 일정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제가 조금 전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으로 표현해야 우리 언어 정서에 맞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발음에 관한 것인데 이 분야는 너무 광범위해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는 없고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말에는 장단음이 있고 이 장단음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서는 혼동을 초래하게 되며 젊은 세대일수록 장단음을 구별하지 않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특히 설교에 있어서는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반드시 지킬 필요가 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빌3:8)"에서 '낫게'와 '해로'의 '낫'과 '해'는 각각 길게 '낟-게(ㅅ,ㅆ,ㅈ,ㅊ.ㅌ의 대표 발음은 ㄷ임)'와 '해-로'처럼 길게 발음해야 본래의 뜻을 살릴 수 있다. 만약 이를 길게 발음하지 않고 '낟게' '해로'처럼 짧게 발음하면 그 뜻은 각각 'Low'와 'Sun'이 되어 정반대의 뜻이 된다. 또 반대로 "태의 열매는 상급(賞給)이로다(시127:3)"와 "너희 화장(化粧)한 것이(렘4:30)"에서 '상급'의 '상'과 '화장'의 '화'는 짧게 발음해야 원뜻을 살릴 수 있으며 만약 길게 발음하게 되면 각각 '上- 級'과 '火- 葬'이 되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독자들 가운데는 뭘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지느냐, 의미 전달만 되었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며 반드시 고치고 지켜야 할 중요 사안이다. 말의 기능을 의미 전달이 다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전술한 대로 자라나는 아이들이 상스러운 말을 해도 의미 전달만 되었다면 구태여 꾸짖거나 바른 말을 쓰도록 지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단이 처음부터 이단이 아니듯 우리 의식의 변화도 잘못 쓰는 말과 함께 서서히 변해 간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예수님도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다.(마12:34) 그리고 우리는 교계에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크리스천들의 언어 생활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삶의 지침서라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일 같지만 큰 일 부터 실천에 옮겨야 한다. 크리스천들의 바른 말 사용이 교회 개혁의 밑거름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최창섭 (뉴스앤조이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