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가 현 황

쿠웨이트 (State of Kuwait)

 

    요  약 

 

(西)아시아 페르시아만의 북서해안에 있는 입헌군주국.

                정식명칭은 쿠웨이트(Dawlat al-Kuwayt)이다.

 

면       적

:

  1만 7,800 ㎢

 

인       구

:

  211만 1,561 명(2002)

 

인구밀도

:

  118.6 명/㎢

 

수      도

:

  쿠웨이트시

 

주요언어

:

  아라비아어 · 영어

 

종       교

:

  이슬람교

 

통       화

:

  쿠웨이트 디나르(KD)

 

환       율

:

  1 달러 = 0.3010 KD (2002.11)

 

국내총생산

:

  309억 달러

 

       (2001)

 

  1 명당 1만 5,100 달러

 

무역수지

:

  수출 162억 달러

 

       (2001)

 

  수입 74억 달러

 

 

    자  연

 

알자흐라의 오아시스, 남동쪽과 해안부의 얼마 안되는 비옥한 땅 외에는 국토의 대부분이 평탄하고 황량한 사막이다.

연안에 암초와 얕은 여울이 많으며, 앞바다에는 부비얀·파일라카섬 등 쿠웨이트가 영유하는 9개의 섬이 띄엄띄엄 있다. 국토 중앙부에는 서쪽을 향해 쿠웨이트항구가 있다.

기후는 아열대성으로 연안부에 난류가 흐르므로 내륙부에 비해 지낼 만하다. 여름철(4∼10월)에는 심한 더위와 건조로 기온이 40℃ 이상 올라가는 일도 있다. 겨울철(11∼3월)에는 타우즈라는 극렬한 모래폭풍이 가끔 불어닥치지만, 이때를 제외하면 선선하고 쾌적하다.

비는 겨울철에 집중되고 연강수량 30∼200㎜로 적지만, 종종 집중호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강이 없어 마실 물이 모자라 대부분 바닷물을 증류시켜 마시거나 이라크의 샤트알 아랍강에서 끌어온 물로 보충한다.

 

 

    역  사

 

메소포타미아 평원 가장자리에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정주민보다 아랍계 유목민과 관계가 더 깊어서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 · 몽골 · 오스만제국 등이 이 지역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16∼18세기에 걸쳐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영국 등 유럽 열강이 인도무역의 독점권을 노리고 잇달아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쿠웨이트라는 명칭은 16세기 포르투갈인이 구축하였던 요새인 작은 성채(kt)에서 유래하였다.

현재의 쿠웨이트시는 18세기초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우나이즈족의 몇몇 씨족이 들어온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바하 · 할리파 · 자이드 · 잘라히마 등 유력한 씨족 후예들이 현재 쿠웨이트인이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사바하 족장이 1756년 쿠웨이트 수장이 되어 사바하 왕조를 열었다.

후계자 무바라크 수장 때에는 오스만제국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1899년 영국과 보호조약을 맺고, 그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 뒤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바스라를 제치고 중계무역 거점이 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후 부르간 대유전 개발을 시작으로 석유산업이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다.

특히 1950년 즉위한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압둘라 시대에는 석유재원이 바탕이 되어 경제 · 사회적으로 큰 성장을 하였으며, 한편 반식민지주의와 민족주의 움직임도 대두되어 영국은 1961년 이전의 보호조약을 폐기하고, 외교권을 포함한 독립주권을 쿠웨이트에 넘겨주었다. 1962년 헌법이 발포되어 주권국가가 되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이라크군의 점령 아래 있었다. 이것은 마침내 1991년 1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과 이라크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쿠웨이트는 다국적군과의 공동전선을 전개, 심한 파괴와 희생 끝에 1991년 3월 이라크군이 퇴각하고 국토를 되찾게 되었다.

 

 

    정  치

 

입헌군주제의 수장국으로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삼권분립을 내세우고 있으나 현실정치는 수장집안을 정점으로 하는 전통적 지배가 계속되고 있다.

수장은 건국 이래 사바하 집안에서 세습하며 자비르계와 살렘계에 평등한 권리가 있다. 지금의 수장은 자비르 알 아흐마드 알 사바하이다.

국회의원도 대부분 수장 일족이거나 부족장으로 보수적 경향이 강하지만, 1971년과 1975년 총선거에서 진보적 야당 아랍민주주의당(ANM)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의원 등도 나왔다.

그러나 1976년 레바논 내전을 둘러싸고 국론분열 위기에 직면하자 수장은 국회를 해산해 버렸다. 1981년 가까스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자바르 수상이 이끄는 보수파가 압승하였고, 1985년 2월 총선거에서는 급진파의 아랍민족주의 운동이 대두되었다.

단원제의 국민의회가 있었으나 1986년 송유관 폭파사건으로 7월 해산되었다.

7개 정당으로 구성된 야당연합은 1991년 6월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1992년 10월 총선거에서는 정부측이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이 승리함으로써 국가를 되찾았으나, 쿠웨이트 왕가를 중심으로 한 지배층이 민주화 실현을 지연시키면서 왕정유지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어 불안 요인이 계속되고 있다.

2001년 1월 의회와의 분쟁 끝에 사바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총사퇴했으나, 2월 아흐마드 알 사바 국왕은 사바 왕세자를 총리에 재임명하고 새 내각구성을 지시하였다.

 

 

    경제 · 산업

 

석유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모노컬처 경제이다. 1950년부터의 급격한 석유산업 발전은 불과 30년 동안에 전통사회를 일변시켰다. 원유 확인매장량은 940억 배럴(1996)로, 채굴가능연수는 100여년이라고 한다. 석유생산량은 1979년 하루 237만 배럴이었으나 석유보존정책과 국제적 원유과잉보유에 대응하여 1982년 4월 이후 하루 120만 배럴로 감산하였다.

석유 채굴은 1938년 쿠웨이트 남부의 부르간 대유전이 쿠웨이트 석유회사(KOC)에 의하여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제 2차세계대전 후부터 생산이 서서히 늘어 1951년 이란 석유국 유화사건 영향으로 수요가 급증하여 1956년 중동 최대산유국이 되었다.

1953년 중립지대에서 미국계 아미노일사가 상업비중이 낮은 바프라 유전, 1956년 KOC가 쿠웨이트 북쪽의 라우드하타인 유전, 60년 일본 아라비아 석유사가 해상의 카프지 유전을 발굴하는데 각각 성공하였다. KOC는 1975년, 아미노일사는 1977년 국유화되었다.

내륙유전은 모두 송유관으로 이어져 부르간 유전에서 가까운 미나알아마디의 거대한 유조선 항구로 모인다.

경제구조도 압도적으로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1980년 국내총생산의 79 %가 원유와 천연가스이고, 1981∼1982년도 세입은 원유 수입이 92%를 차지하였다.

걸프전쟁의 피해로 모두 732개의 유정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석유시설의 파괴로 750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 이후 급격한 시설복구로 1992년말 하루 150만 배럴의 생산수준에 도달하여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하였다.

한편 고용인구는 석유관련산업 노동자 총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1975년 국세조사 때 겨우 1.6%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정부관청이나 공공부문에 고용되어 있다.

정부는 석유의존형 경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석유 외의 여러 산업에도 힘을 기울여 쿠웨이트시 남쪽 50㎞의 슈아이바에 페르시아만에서 가장 큰 공업지대를 건설하였다. 화학비료 · 해수담수화(海水淡水化) 플랜트 · 석유정제 · 석유화학 · 액화석유가스 등 큰 공장이 모여 있다.

그 가운데 공업생산의 3/4을 차지하는 석유정제업이 중요하며, 슈아이바 · 미나압둘라 · 아마디 등의 정유소가 있다. 아하마디에는 연간 생산능력 150만t의 액화석유가스(LPG)공장도 있다.

그 밖에 식품 · 청량음료 · 제분 · 건설 등의 공장도 있으나 국내 시장이 좁고, 물 · 땅 · 원자재와 숙련된 노동력이 부족해 비약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으며, 또한 농업에 알맞은 토지와 물이 매우 모자라기 때문에 농산물 생산도 미약하다. 약간의 야채 · 멜론 · 대추야자 등이 생산되고 있으며, 전통적 유목민이 양 · 염소 등을 주로 기른다.

어업은 페르시아만 근해에 수출용 새우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어류가 풍부하여 유망한 산업에 속한다.

무역은 수출총액의 약 80%가 원유·석유제품이다. 전통적 중계무역이 활발하며, 석유 이외에는 재수출이 눈에 띈다. 수입은 근래에 기계 · 자동차 · 전기제품 · 플랜트류 · 공업 원자재 · 식료품 등이 급증하고 있다.

국제수지는 석유수출과 해외투자수익으로 대폭적인 흑자운영이다. 남는 재원을 경제 · 사회개발에 투자하는 외에 1976년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기금(RFFG)을 설립해 장래 석유가 고갈되었을 때를 대비하고 있다.

한편 선진자본주의국가에 대한 대외투자와 아랍권 및 그 밖의 발전도상국에 아랍개발쿠웨이트자금(KFAED)을 통해 대외원조 · 융자를 하고 있다.

2001년 들어서 국제원유가의 상승으로 대폭적인 재정수지흑자를 내고 있다. 2001년 수출액은 162억 달러, 수입액은 74억 달러이다.

 

 

    주민 · 문화

 

주민은 대부분 아랍인 이슬람교도이다.

근래에 인구증가가 두드러져 1950년 약 15만 명에서 2002년 약 211만 명으로 늘었다.

인구가 급증한 주원인은 자연증가율과 함께 석유붐을 타고 들어온 이웃 아랍 여러 나라와 이란 · 이라크로부터의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 때문이다. 1980년 외국인이 전인구의 60%를 차지해 쿠웨이트인을 웃돌고 있으나, 그들의 생활수준 · 법적 지위의 격차가 사회불안문제가 되고 있다.

쿠웨이트는 석유 덕택으로 <풍요한 국가>를 구축해 사회복지가 잘 이루어져 저소득자에게는 쾌적한 주택을 주고, 외국인을 포함한 무료의료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완전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은 1976년 6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그 해 7월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두 나라는 항공협정(1981.10) · 5개년 문화협정(1982.10) · 체육교류협정(1983.6) · 경제기술협력과 무역증진협정(1983.8) · 항공운수면세협정(1984.12) · 정보기술협정(1987.2) 등을 맺었다.

쿠웨이트는 수교 전부터 한국의 주요 교역상대국이었으며, 특히 제 1차 석유위기 이후 해마다 6억 달러 어치의 원유를 수입하였다. 이는 제 2차 석유위기가 시작된 1979년 11억 5000만 달러, 1980년 17억 5000만 달러로 늘었다.

통상면에서는 2001년 한국이 원유 22억 5070만 달러를 수입하고, 합성섬유 · 철강제품 등 1억 7848만 달러를 수출하였다.

1997년 6월 현재 교민 125명, 체류자 323명이고, 한국인 학교도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한국은 의료 및 수송부대를 파견한 바 있다.

북한과는 수교하지 않았으나 무역협정에 따라 통상대표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