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근 소 식

 

걸 프 전 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탈(侵奪)이 계기가 되어, 1991년 1월 17일∼2월 28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3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이라크 ·쿠웨이트를 무대로 전개된 전쟁.  

 

쿠웨이트가 원유시장에 물량을 과잉공급하여 유가를 하락시킴으로써 이라크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한 바 있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 점령하고

수색을 하는 군인들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속주(屬州)로 삼아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라크의 침공 직후 쿠웨이트 왕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피신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각국은 8월 2일부터 12개에 이르는 대 이라크 유엔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라크군의 즉각적인 쿠웨이트 철수와 쿠웨이트 왕정복고, 대 이라크 무역제재 등의 강력한 이라크 응징을 결의하였다.

 

폭탄이 터진 곳을 지켜보는 사람유엔 안보이사회는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이라크에의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를 전후하여 미국이 대 이라크전에 대비한 다국적군의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43만의 미군을 포함한 33개국의 다국적군 68만 명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해 이라크도 50여 만의 정규군과 50여 만의 예비군을 동원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 공화국 수비대 15만을 쿠웨이트 및 이라크 남부 지역폭탄이 터진 곳을 지켜보는 사람에 집중시켜 대치하였다.

미국은 이라크의 철수시한 이틀 뒤인 91년 1월 17일 대공습을 단행하여 이로부터 1개월간 10만 여 회에 걸친 공중폭격을 감행, 이라크의 주요시설을 거의 파괴하였으며, 2월 24일에는 전면 지상작전을 전개,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군을 축출한 뒤 지상전 개시 100시간 만인 2월 28일 전쟁종식을 선언했다.

이라크군은 42개 사단 중 41개 사단이 무력화되고 15만 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패퇴하였으며, 다국적군은 125명의 전사자를 냈다.

걸프전쟁의 결과 중동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하에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라크군이 파놓은 해안경비 참호 속에서 어린이들이 쿠웨이트 깃발을 흔들며 해방을 기뻐하고있다한국은 5억 달러의 지원금을 분담하고 군의료진 200명, 수송기 5대를 파견하여 33개 다국적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 전쟁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른 집단안보를 위한 조치로 취하여진 전쟁으로,

첫째 그 동안 개발하여 실전에서 실험하지 못한 하이테크 병기의 실험장이었으며,

둘째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여론(輿論)을 조작한 전쟁이었고,

셋째 산유(産油) 지역에서 산유국끼리 직접 정면대결한 전쟁이었고,

국가에 의한 인질전략을 사용하였다는 특징을 지닌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