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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일 원로목사

 

 

"순종이 곧 목회... 녹슬지언정 닳아지지 않는다"

 

<방지일목사 목사안수 70주년 특집 편집국장 대담>

 

지난 4 29일 영등포교회는 원로목사인 방지일 증경총회장의 목사안수 7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며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목회자가 목사 안수 7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경우는 우리 교단으로서도 최초로 맞이하게 된 경사이다. 총회 파송 최초의 중국선교사, 평양장대현교회 시무 전도사, 증경총회장 등 우리 교단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한국교회의 진정한 원로 방지일목사를 만나 그의 인생관과 목회관에 대해 듣고 지난 사역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편집자 주>

대담자 : 편집국장 안홍철 목사

정리 : 표현모 기자

사진 : 임성국 기자

 

안홍철 국장(이하 안) : 목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예전 같으면 70세까지 사는 것도 귀한 일인데 목사안수 70주년을 맞이하신 것은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까마득한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목사님의 목사안수 70주년을 진심으로 찬하드립니다.

특별히 올해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이 1백 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목사님께서 안수 받기 전까지(1933~37)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길선주 목사님과 동역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절 상황을 말씀해 주시지요.

 

방지일목사(이하 방) : 목사안수를 받은 지가 만70년이요, 전도사로 일 한 지는 74년, 평양에서 숭실대학을 다니며 야간학교를 하며 1929년에 정오리교회를 개척했는데 그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참 긴 시간을 걸어왔군요. 회고하면 오직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지요. 길 목사님의 말세론 사경회는 많이 참석하였거니와 그분이 앞을 잘 못 보시니 손을 잡고 다니며 모시기도 했지요. 내가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에는 그 분께서는 이미 은퇴하신 원로목사님이셨지요. 그러나 그 철저한 가르침이 아직도 나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다. 장대현교회는 서도(西都)의 첫 교회로서, 거기서 실천신학을 학습했다 하겠군요.

 

: 20세기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교회가 21세기 들어서면서 교세 성장이 둔화되다가 최근에는 교세 감소로 인해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평양의 부흥을 경험하셨던 1세대 목회자로서 현재 한국교회의 교세감소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많은 사람들이 교회발전의 둔화를 운운하는데 요즈음은 아이들을 훨씬 덜 낳으니 유년 주일학교가 교인비율이나 숫자적으로 둔화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장년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군요. 내가 있던 영등포교회의 현상이 딱 그렇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전도대회를 하면 이 교회 저 교회로 몰려다니며 이중 삼중으로 이름이 올라 있던 양상도 있었으나 이제 그 거품이 가라앉는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는 지금도 착실히 전도도 하고 있고,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성숙을 가져오는 시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 저희가 알기로는 1937 27세의 나이에 총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21년간 사역하신 것으로 압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마지막 9년간은 홀로 선교하셨고 결국 추방까지 당하시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 27세의 햇병아리로 안수를 받고 중국의 공맹의 터전이요, 중국 문화의 발상지인 산동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곳을 선교지로 택한 착상부터 그러했고 중국목사의 적을 가지고 갔던 것도 그러합니다.

나는 신학을 마치고 미국으로의 유학 길이 다 열리기도 했으나 어차피 공부를 하고 돌아와도 복음의 역군으로 나아갈 것이니 총회의 분부를 받아들여 선교사로 갔지요. 절친한 내 기도의 동지요 친구인 박윤선과 김진홍은 유학의 길로, 나는 총회의 분부를 받아 선교사로 갔지요. 가 있는 동안 전란으로 다섯 번이나 정변을 당하는 그 일이 참으로 어려웠으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이도 실천의 역사로 제게는 한 공과였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에서 다섯 번의 정변으로 인해 중국난민뿐 아니라 한인 교포의 난민까지 돌보면서 수천 명이나 되는 난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공산당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자 우리 총회에서도 소환장이 왔고 미국영사관에서도 마지막 철수하는 배에 탑승시키라는 명을 받았다며 찾아왔었습니다. 그 때에도 난민들이 수천 명 같이 있었는데 이들을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종종 누군가 묻기를 "순교의 각오를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정변의 소용돌이와 공산 치하에 있어보면 하루 하루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날 밤이 되면 오늘은 살았구나 하며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공산당에 정권을 잡은 이후 결국 추방을 당해 홍콩을 통해 한국으로 오게 됐지요.

 

: 귀국하셔서 영등포교회를 시무하시고 영등포 교회 원로목사로 은퇴하셨는데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목회란 무엇인가요?

 

: 중국서 돌아와서도 나는 언제고 기회가 되는대로 중국의 내 교인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영등포교회의 강단이 비어있는고로 강단을 지켜드린다 하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반세기가 되었으니 이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일 뿐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같이 오래 있겠다는 설계가 있던 것은 아니지요.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떼와 소떼를 맡았으니 그들에게 내 마음을 다한다 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지낸 것뿐이요, 한 우물을 파고 지냈다 할 것뿐이지요. 목회는 주님께서 목자시라 나는 그저 순종일 뿐이지요.

 

: 목사님께선 제56대 총회장을 역임하셨는데 목사님 재임 중에 한국선교 1백 주년을 향한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준비위원을 선임하는 등 선교 1백 년을 향한 준비에 힘쓰신 줄로 아는데 그 외에도 총회장으로 재직하시면서 기억나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한 일은 그저 사회를 보고, 동의 재청을 물어 통과시키는 역할이었지요. 우리 장로교회 정치는 총회가 하는 일이요, 총회장의 권리는 없지요. 다만 제가 총회장 때에 70세 정년제가 가결되었고, 그 전에 우리 장로교 1백 주년을 지내는데 동참한 것은 제 생애에 있어서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때에 제가 제의 한 일로 4대 목사와 4대 장로의 표창을 제의하였는데 그 때에 추천한 4대 목사가 현존한 림인식 목사님의 4대 목사 가정, 작고 했거니와 장대재교회 이재후 장로 가족 4(이용설 장로는 2대, 3대와 4대는 재미교회장로)였습니다. 우리 백 주년의 자랑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더 흐른고로 많아졌겠지요. 김형태 목사님네도 4대 목사이고, 감리교 이호빈 목사님네도 4대이지요. 그는 본시 우리 장로교 목사지요.

 

: 최근에도 전세계 선교지를 다니며 후배 선교사들에게 선배로서 지혜를 전하고 말씀으로 격려하시고 매주 월요일에는 후배 목사들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토록 왕성하게 활동하실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 은퇴 후 때로 출국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내가 목회하던 영등포교회 교인들을 심방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다음은 제가 중국 선교사이다 보니 선교대회에 참석도 하고 선교사들이 일선에서 선교하는 현장을 돌아보며 격려도 하고자 다니게 되었지요. 거의 일년의 반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고 보아집니다. 내 집안 아이들의 말로는 늙은 불구자로서 남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억지이긴 하나 이것도 유익한 역사였다고 보아집니다.

 

: 기독공보는 목사님과 땔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목사님께서는 73년부터 75년까지 본사 사장을 역임하셨고 83년도엔 본사 이사장을 역임하시면서 본사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일과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십시오.

 

: 기독공보는 참으로 쉽게 오늘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사장이던 때에만 하더라도 인쇄비를 지불 못할 정도로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가 집회를 하는데 당시 김인식 총무께서 전화로 안타까워 하며,인쇄비가 없으니 어떻게 하냐고 물어오더군요. 나는 그저 내가 책임질 터이니 일단 찾아 발송하라는 이야기를 하도 돌아와 겨우겨우 지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럴 정도였는데 이만큼 발전한 것을 보니 참으로 감격뿐이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근검절약' 이 두 글자를 기억하시면서 더 튼튼하게 발전시키게 되어지기를 바라며, 개교회의 기사에 치중해야 교회와의 관계가 튼튼해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자 대부분이 평교인들이 중심 되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대로 외래어를 한국발음으로 쓰지 말고 우리말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NCC UN 등의 단어를 한국기독교교회연합이나 국제연합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제의를 나는 몇 번 했으나 생각들이 다르니 그리 실행되지 않더군요. 중국에 있을 때 그 사람들은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 자기 말로 번역하여 부녀자들도 알 수 있게 만들더군요.

 

: 올해로 평양대부흥운동 1백 주년을 맞이했는데 그 진원지인 장대현교회에서 시무를 했던 장본인으로 현재 교회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 당시에 부흥이 일어났던 것은 부흥사경회를 통해서였지요. 그러나 요즘과 다르게 당시에는 부흥회를 하면서도 성경을 중요시했는데 지금은 너무 정서에만 기대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은 자기 중심이지 하나님 중심이 아니에요.

감정에만 호소해서는 안되고 성경을 공부해야 그 사람 안에 경건이 들어가게 됩니다. 기도 소리도 자기 귀에 들릴 정도로 조용조용 기도하는 것이 좋고, 설교 말씀 후에 친교의 시간을 갖는 것보다도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올해로 97세이신데 이렇게 정정하신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갑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건강하셔서 통일되는 것도 보시고 목사님 시무하셨던 장대현교회에도 직접 가보시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공보 2007. 5. 2)